카마그라구입 12·3 불법 계엄 관련 내란·외환 의혹을 수사하는 조은석 특별검사가 오는 30일 추경호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한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특검팀은 추 전 원내대표에게 오는 30일 오전 10시 내란중요임무종사·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피의자 신분으로 내란 특검 사무실이 차려진 서울 서초구 서울고검 청사로 나와 조사받으라고 통보했다.
특검팀은 추 전 원내대표에게 더 이른 날짜에 나와 조사받으라고 했지만, 추 전 원내대표 측에서 국회 국정감사 일정을 고려해 미뤄달라고 요청하면서 일정을 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지영 특검보는 이날 브리핑에서 “추 전 원내대표가 특정 일자에 출석하기로 협의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지난해 12월3~4일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 소집 장소를 세 차례 바꿔 의원들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표결 참여를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추 전 원내대표는 계엄 선포 이후 비상 의총을 소집하면서 장소를 국회→당사→국회→당사로 세 번에 걸쳐 바꿨다. 그 결과 당시 국민의힘 의원들은 여의도 중앙 당사와 국회 본청에 흩어져 108명 중 18명만 해제 표결에 참여했다.
특검팀은 추 전 원내대표를 소환하기 전 계엄 당시 국힘 원내대표실에 있었던 당직자와 일부 국회의원 등을 불러 조사하면서 계엄 때 국회 상황에 대한 재구성 작업에 몰두했다. 특검팀은 계엄 선포 당시 추 전 원내대표의 통화 내역을 확보하면서 그가 윤 전 대통령 등과 통화한 사실도 확인했다. 특검팀은 추 전 원내대표가 윤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 여당으로서 계엄이 성공하도록 도우라는 지시 등을 받았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특검팀이 추 전 원내대표 외에도 당시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일부 국민의힘 의원을 공범으로 조사할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실에 머무르며 표결에 불참한 의원 8명(추 전 원내대표·조지연 ·신동욱·송언석·정희용·임이자·김대식·김희정 의원)들이 그동안 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의 핵심 참고인 등으로 주목을 받았다.
‘고충운, 발해인. 선조는 해동 구려국의 왕족…증조 할아버지는 당나라(皇)의 국내성왕(國內城王), 할아버지는 국내성 좌상(左相)….’
얼마전 신라사학회 주최 발표회에서 알쏭달쏭한 내용의 따끈따끈한 논문이 새롭게 소개되었다. 루정호(樓正豪·러우정하오) 절강(浙江·저장)해양대 교수의 ‘고구려 유민 고충운 묘지명 고찰’ 논문이었다.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 4세대인 고충운(?~774)의 행적을 기록한 돌판(묘지·墓誌) 관련 연구다. 고충운 묘지명은 ‘평원 발해인 출신인 고충운의 선조는 해동 구려국(고구려)의 왕족이며 고구려 멸망 때 포로로 잡혀왔고, 이후 고씨를 성씨로 정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발해 고씨와 고구려인
‘우선 고충운의 본관을 ‘발해인’이라 했다. 이 대목에서 오해는 금물이다.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세운 해동성국 ‘발해’가 아니다. 중국의 사족 가문인 ‘발해 고씨’를 일컫는다. ‘발해 고씨’ 가문의 거주지는 ‘하북(河北) 수현(蓨縣·현 景縣)’이었다.
고충운 만이 ‘발해 고씨’를 칭한 것은 아니다. 다른 고구려 유민인 고연복·고목로·고덕·고흠덕·고진·고씨 부인 등의 ‘묘지명’에도 ‘발해인’ 또는 ‘발해수인(渤海蓨人·수현 출신)’이라 했다.
고구려 ‘고씨’의 경우 당나라에 와서 한자가 같은 ‘발해(하북 수현) 고씨’를 가문의 본관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충운 묘지명’은 “당나라가 고구려 왕(보장왕)을 포로로 삼아 중원으로 이주시켰고, 이후 자손들은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사실 유민 1세대의 경우 ‘발해 고씨’처럼 중국 성을 빌린 경우는 없었다.
왜냐면 고구려 지배층의 경우 그 지위가 당나라에서도 먹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세대 유민의 경우 그 출신지를 ‘국내성’(고제석·649~674), ‘요동 삼한(고현·642~690)’, ‘요동 평양’(고족유·626~695), ‘조선’(고자·665~697), ‘요동 책주’(길림성 흔춘 출신·이타인·609~677) 등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후 60여 년이 지난 730년 무렵부터 양상이 달라진다. 이때부터 조성되는 묘지에는 고구려 색채가 옅어진다,
즉 고목로(650~730)·고덕(676~742)·고원망(697~740)·고진(710~773) 등 중국 성(발해 고씨)을 빌리거나 ‘경조 만년’(장안 출신·천비·707~729), 태원(산시성 출신·왕경요·680~734)처럼 중국을 출신지로 삼는다. 그러나 고구려 출신이라는 점을 굳이 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국내성 왕의 정체
이번에 소개된 ‘고충운 묘지명’가 그렇다. ‘발해 고씨’라 해놓고도 ‘고구려(해동 구려) 출신’ 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증조 할아버지(고달)와 할아버지(고몽)가 ‘국내성 왕(國內城王)’, ‘국내성 좌상(國內城 左相)’을 지냈음을 자랑스레 알렸다.
이를 두고 루정호 교수는 “국내성 왕과 국내성 좌상은 허위의 칭호일 뿐 실제로 왕이나 좌상으로 봉해진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했다. ‘국내성 왕’은 국내성 고구려 유민을 관리하는 ‘자사(혹은 현령)’이고, ‘국내성 좌상’은 자사(혹은 현령)을 보좌하는 지위였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료 분석인만큼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묘지명은 당대의 기록이 아닌가. 역사서의 기록은 없지만 당대에 ‘국내성 왕’이나 ‘국내성 좌상’ 같은 칭호가 부여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안정준 서울시립대 교수)
또한 ‘고충운 묘지명’엔 “당시 계속된 전쟁으로 나라에 위기가 닥치자 붓을 버리고 입대하여 무공을 떨쳤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고충운이 죽은 ‘태원부 복창리 관사’(현 산서성 태원시 복창항·山西省 太原市 福昌巷)는 ‘안사의 난’(755~763)-‘복고회은의 난’(764~765) 때 주요 전쟁터였다. 루정호 교수는 “잇단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고충운이 군사요충지인 태원부에 장기 주둔하다가 9년 뒤(764)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배신자 가문의 무덤
‘고충운 묘지명’ 소개를 계기로 당나라 권역에서 확인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을 헤아려 봤다. 30여 건에 이른다. 필자는 그중 주요한 두 가문을 소환해본다.
700년 고구려 역사를 나락으로 빠뜨린 두 원흉, 즉 ‘연남생과 보장왕’의 가문이다.
우선 ‘연남생 가문’을 보자. 연남생 가문의 성씨는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618~626)과 이름자가 같다 해서 ‘천(泉)씨’로 창씨개명 했다.
헤아려보니 만 10년이 흘렀다. 2015년 10월 필자는 강남문화원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낙양(뤄양·洛陽)의 북망산 인근, 한적한 농촌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은 1922년 ‘천남생 일가의 묘지명’이 출토된 낙양시 맹진현(孟津縣·멍진현) 송장진(送庄鎭·쏭좡진) 동산두촌(둥산터우촌·東山頭村)이었다.
마을 주변을 샅샅이 살피던 답사단은 잡풀과 나무가 듬성듬성 자란 봉분 3기 모양의 지형을 보았다.
천남생(634~679)-헌성(650~692·아들)-비(708~729·증손자)의 무덤이 확실했다.
■골육상쟁-배반
천남생 일가의 묘지명을 보자. 우선 남생의 것….
“공(남생)은 고구려를 떠나 태평한 나라(당)로 귀순했다. 668년 고구려 정벌을 책임지고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처럼 내쳐서 평양성에 다달아~높은 성벽의 성가퀴를 깨뜨렸다. 그 공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가 갑자기 죽으니 황제의 슬픔이 진실로 깊었다.”(‘천남생 묘지문’)
고구려의 대막지리 연개소문(590~665)은 슬하에 남생(634~679)-남건(생몰년 미상)-남산(639~701) 등 삼형제를 두었다. 연개소문은 삼형제의 반목을 예견한듯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목해야 한다. 절대 다투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665년(보장왕 24)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인 남생이 대막지리 자리를 물려받아 국정을 총괄했다.
하지만 남생이 국정을 두 동생인 남건과 남산에게 맡기고 지방순찰에 나선 것이 파국을 불렀다. 형제 간 반목을 부추기던 불온 세력의 올가미에 걸렸다. 남생-남건·남산 사이에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두 동생은 남생의 맏아들 헌충을 죽였다. 이에 국내성으로 피한 남생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둘째 아들 헌성을 비롯해 3번이나 당나라에 항복사절을 보내 원군을 청한 것이다.
결국 666년 남생이 이끌던 국내성 등 6개성 10여 만 호가 투항하고 말았다.(‘천남생 묘지명’)
■당나라군의 앞잡이
이제 ‘연남생’은 ‘천남생’이 되어 고구려 정벌의 앞잡이가 됐다. 당나라로서는 천군만마였다.
당나라의 가언충은 황제(고종)에게 “예전에 고구려엔 틈이 없었지만 이젠 남생 덕분에 내부사정을 다 알 수 있으니 반드시 이길 것”(<삼국사기> ‘보장왕’조)이라고 자신했다. 그것이 현실이 됐다.
“668년 9월 남생은 승려 신성 등과 내통했으니…보장왕과 남건은 포로가 됐으며….”(‘천남생 묘지문’)
마지막 순간까지 평양성을 지키던 둘째(남건)는 스스로 목을 찔렀지만 미수에 그쳤다. 결국 장안으로 압송된 남건은 원지로 유배되었다.
남생의 씻을 수 없는 죄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앞장서서 막았다는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가열찬 독립운동을 펼쳤다.
멸망 직후인 669년 ‘고려의 배반자들이 많아 황명으로 3만8200호(2만8800명)를 여러 주로 이주시켰다’(<자치통감>)는 기사가 보일 정도다.
당나라는 남생을 고구려인의 집단 이주 지역인 요동 지역에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막아섰다.
679년 연남생이 46살로 죽자 당나라 조정은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천남생 묘지명’을 보면 ‘국장(國葬)’이 연상될 정도다.
“남생이 죽자 황제는 안타까워했고…예를 갖춰서 책봉을 이행…견포(명주실로 짠 비단과 무명) 700단과 속미(쌀과 벼) 700석을 하사…장례 및 매장 비용을 관이 지급…3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고…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조문하도록….”
묘지명은 이어 ‘고구려를 황제의 땅으로 만들고, 검을 들고 황제를 지켰다’는 등 남생의 8가지 공로를 길게 열거했다. ‘묘지명’은 특히 남생의 죽음을 ‘제후의 죽음’을 뜻하는 ‘훙(薨)’이라 했다.
■대를 이어 충성
남생의 아들인 헌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천헌성 묘지명’에 따르면 천헌성은 두 아우(남건·남산)에게 쫓겨 국내성에 웅거하고 있던 아버지(남생)의 명을 받아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666)
“16세였던 헌성은…아버지 남생에게 ‘이제 중국에 입조하여…중국 군대와 힘을 합해 (고구려를) 토벌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권했다. 이에 남생은 ‘옳다’고 여겨…대형 불덕-염유에 이어 헌성까지 파견…당나라군을 이끌고 와서 고구려를 쓸어버렸으니….”
‘천헌성 묘지명’은 이어 “(당군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남생이 집안을 지키고 나라를 보전한 것은 실로 공(헌성)의 공이었다”고 평했다. 33살의 아버지(남생)과 16살 아들(천성)이 705년 역사에 빛나는 고구려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천헌성은 당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친다. 686~688년 헌성은 돌궐 정벌의 선봉에 섰고, 모반사건을 진압한 공로로 비단 100단과 황제가 타던 말 1필을 하사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명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혹리의 대명사인 내준신(651~697)의 덫에 걸린 것이다.
“691년 당대 형벌과 옥사를 농단했던 내준신이 천헌성에게 뇌물을 요구했다. 그러나 헌성이 거부했다. 그러자 앙심을 품었던 내준신은 다른 올가미를 씌워 천헌성을 죽였다.”(‘천헌성 묘지명’)
그러나 헌성의 죄가 무고로 밝혀짐에 따라 황제(무측천·재위 690~705)의 사면을 받았다.(700) 헌성에게는 정3품의 관직이 추증됐다.
천헌성의 아들인 천은은 ‘정2품’의 작훈을 받았다. 또 천헌성의 손자이자 천남생의 증손자인 천비는 겨우 2살 때 정5품 관직(식읍 400호)의 주인공이 됐다.
당나라에서 테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던 천비는 22살에 요절했다. ‘천비’의 묘지명은 아버지(천은)가 썼다. 천은(3대)이 아들(천비)의 무덤을 할아버지(천남생)과 아버지(천헌성) 곁에 조성했다.
천은은 아들(천비)의 묘비명을 쓰면서 아들의 출신을 ‘경조 만년’(당나라 도읍 장안)이라고 표현했다. 멸망 후 3대가 지났으니 고구려 정체성도 흐려졌을 것이다. 그런만큼 아들의 출신지에 굳이 ‘고구려’를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허망한 향수병
이 대목에서 놓친 인물이 한 명 있다. 남생의 막내동생은 남산이다.
남산의 무덤은 남생 일가의 묘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다. <삼국사기>는 “668년 9월21일 (막바지에 몰린) 보장왕이 항복 사절로 보낸 인물이 천남산”이라 했다. <구당서>는 “남보다 먼저 항복한 남산에게 관직(사제소경·종4품 상)을 제수했다”(‘동이열전·고구려’조)고 했다.
그렇게 투항한 남산은 남생-헌성-은-비의 직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 호의호식했다.
1923년 4월 낙양 맹진현 평락진(平樂鎭·핑러진) 유파촌(劉坡村·리우포촌)에서 확인된 ‘천남산 묘지명’에 나와있다.
묘지명은 “남산은 투항 이후 금허리띠를 차고 황실의 번역관 일을 하면서 저녁엔 음악에 심취한채 지냈다”고 했다. 남산의 묘지명 곳곳에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고국으로 가는 길은 먼데, 상여 실은 수레는 언제쯤 돌아갈까…금으로 된 허리띠에 패옥으로 꾸몄으나, 북소리와 종소리는 근심과 어지러움이요, 그리운 마음은 길게 뻗친 숲이로다….”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고국…. 허망한 향수병이었다.
■조선군왕 집안
그렇다면 보장왕 일가는 어떨까. ‘고진’과 ‘고씨 부인’의 묘지명이 눈길을 끈다.
‘고진 묘지명’의 주인공인 고진(701~773)은 중국 성씨인 발해 고씨를 자칭했다. 그러나 묘지명은 “할아버지인 장(震)은 조선군왕이고, 아버지 연(連)은 안동도호”라 했다.
할아버지 ‘장’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642~668)을 가리킨다. 묘지명은 “고진은 부여의 높고 존귀한 가문이며 진한의 명망있는 집안인데, 귀순하여 대대로 왕을 칭했다”고 했다.
또 1999년 소개된 ‘고씨 부인 묘지명’은 “고씨 부인(731~772)의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왕(보장왕), 할아버지는 ‘고연’이며, 아버지가 ‘고진’”이라 했다. ‘묘지명’은 “고진의 4녀가 고씨 부인”이라 했다.
여기서 보장왕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돌아본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보장왕은 그 아들 복남·덕남 및 대신 등 20만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삼국사기> ‘문무왕’조) <구당서> 등은 “669년 5월 고구려인 2만8200가구를 당나라로 끌고 가 전국 각지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했다.
■보장왕의 굴욕
그 해 12월 당나라 수도 장안의 함원전에서 열린 ‘고구려 정벌 보고식’에서 보장왕은 다시 한번 굴욕감을 느낀다.
즉 보장왕은 당 고종으로부터 사평태상백(정3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천남생의 변국공(묘지명에서는 현도군개국공·정2품)보다 낮은 작훈이었다. 작훈은 공적의 경중에 따라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 5등급으로 나뉜다.
그후 들불처럼 일어난 고구려 부흥운동이 신라의 대당 투쟁과 연결되면서 당나라는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결국 나·당 전쟁에서 패한 당나라는 장안에 머물고 있던 보장왕을 요동도독으로 삼고 조선군왕으로 책봉했다.(677년 2월)
그런 뒤 당나라 각지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을 함께 돌려보았다. 하지만 당나라를 보장왕을 신뢰하지 않았다. ‘천남생 묘지명’은 “남생이 677년 황명을 받들어 요동에 파견되어 그곳 주민들을 위무했다”고 했다.
한마디로 당나라가 보장왕을 조선군왕으로 파견하면서, 그 보장왕을 감시할 당나라 관리로 ‘천남생’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보장왕의 궐기
보장왕은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도 700년 고구려 제국의 군주가 아닌가. 2년 뒤인 679년 1월29일 천남생이 4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보장왕은 “이때다” 싶어 봉기에 나선 것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거사는 사전에 발각된다.
“보장왕이 요동에서 반란을 꾀하고 몰래 말갈과 통했다.”(<삼국사기>)
“보장왕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보장왕은 촉 땅(지금의 사천성 공주)으로 유배되었다.”(<구당서> <신당서>)
고구려 유민은 반란의 무리로 찍혀 다시 하남과 농우(감숙성·甘肅省)로 강제 이주됐다.
머나먼 촉땅으로 유비된 보장왕은 거사 실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장왕은 682년 서거했다. 당나라는 보장왕에게 위위경의 관작을 추증했다. 당 황제는 보장왕의 시신을 장안으로 운구하도록 했다. 보장왕의 시신은 동돌궐의 마지막 왕인 힐리가한(재위 620~634)의 곁에 묻혔다.
당나라는 보장왕의 손자인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하고(686), 아들인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다.(699)
또 보장왕의 또다른 아들인 고련도 안동도호의 관작을 받았고, 그 관작은 손자인 고진에게 세습되었다.
당나라가 한때의 고구려 군주를 대를 이어 예우해준 것일까. 달리 보면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대가 흘러갈수록 고구려 유민은 신라와 돌궐, 말갈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구당서> 등은 “갈수록 고구려인의 호구가 줄어들면서 결국 고구려의 군장(君長)이 끊겼다”고 했다. ·
■결국은 반역자
보장왕 가문과 연(천)남생 일가의 삶을 살펴보니 어떠한가. 이중 보장왕은 연씨 가문의 서슬에 재위 재내 허울 뿐인 군주였다. 결국 망국의 책임까지 짊어졌다. 하지만 보장왕의 끝은 그래도 봐줄만 했다.
신라의 경순왕, 고려의 공양왕, 조선의 순종 등과 비교해보자. 그래도 보장왕은 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친 군주가 아닌가. 연남생 일가는 그렇지 않았다.
세계 제국 당나라와 맞짱을 뜬 아버지(연개소문)의 뜻을 저버리고 나라를 들어 당나라에 바쳤다.
그 뿐이 아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저지하고 당 황제를 위해 대를 이어 충성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1075~1151)은 이렇게 평가했다.
“남생·헌성이 비록 당나라 황실에 알려진 신하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역자가 됨을 면할 수는 없다.”(<삼국사기> ‘열전·연개소문’)
그나마 자결까지 시도하면서 끝끝내 항복을 거부했던 연남건 만이 배신자 가문의 한가닥 남은 양심이 아니었을까.(이 기사를 위해 안정준 서울시립대 교수, 권덕영 부산외국어대 교수, 김병희 경기대 초빙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루정호, ‘고구려 유민 고충운(高冲雲) 묘지명에 대한 고찰’, 신라사학회 학술월례회 발표논문, 2025
권덕영, <재당 한인 묘지명 견구-자료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21
여호규·배근흥, ‘유민 묘지명을 통해본 당의 동방정책과 고구려 유민의 동향’, <동양학> 69권,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2017.10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유민사>사7), 동북아역사재단 한중연구소, 2024
안정준, ‘당대(唐代) 묘지명에 나타난 중국 기원 고구려 유민 일족의 현황과 그 가계 기술-고구려 유민의 개념과 범주에 대한 제언’, <역사와 현실> 101호, 한국역사연구회, 2016
김수진, ‘당경 고구려 유민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 2017
김현숙, ‘중국 소재 고구려 유민의 동향’, <한국고대사 연구> 23, 한국고대사학회, 2001
[주간경향]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한 고시원에 혼자 사는 김상철씨(83·가명)는 이른 오전에 집을 나선다. 보통 아침은 먹지 않는다. 45분가량 지하철을 타고 3호선 안국역에 내려 근처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에 간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탁구를 하고 센터에서 점심을 먹는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라서 식대는 내지 않아도 된다. 점심을 먹은 후 500m쯤 걸어서 종로3가역 인근 탑골공원으로 간다. 혼자 벤치에 앉아 쉬거나, 얼굴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잠깐 얘기도 나눈다. 약속 없는 만남이기에 못 만나도 개의치 않는다. 장기판이 있었을 땐 자리 날 틈을 기다렸다 장기를 두기도 한다. 탑골공원에서 2~3시간 시간을 보내다 동대문까지 걸어간다. 거기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시 고시원, 조촐한 저녁 식사를 한다.
지난 10월 14일 오후 탑골공원 벤치에 앉아 쉬던 김씨를 만났다. 김씨의 하루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비슷하다. 복지센터는 ‘빨간날’은 쉬니까,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탑골공원에 더 머무른다. “집에만 있으면 근육이 굳으니까 밖에 나가야 한다”는 김씨는 탑골공원에 다닌 지는 10년쯤 됐다고 했다.
“탑골공원이 왜 좋으세요?”(기자)
“좋은 것보다는 걸어다니면 힘드니까 좀 쉬어가는 거지요. 여기 주변에 행사 같은 거 구경도 하고.”(김씨)
젊을 때 중동에 가서 일했다는 김씨는 75세까지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고 했다. “65세 넘으면 일하기 어려운데 기술이 있으니까 하청업체로 들어가 일했다”고 했다. 지금은 생계급여로 매월 76만원을 받는다. 고시원 월세가 29만원. 50만원이 되지 않는 돈으로 한 달을 산다. 대화 중에 김씨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동주민센터에서 다음날 방문하겠다는 안내 전화였다. 동주민센터에서는 김씨에게 생필품을 챙겨주고, 안부도 자주 확인한다. “제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어서 더 관리를 해줘요. 고마운 일이죠. 한동안 죽으려고 했어요. 수면제를 모아서 먹고 잤는데 아침에 안 죽고 깨어났어요.”
김씨는 “집에 혼자 있으면 옛날 생각도 나고, 별생각이 다 든다”고 했다. “늙으니까 고독감이 생긴다. 그게 힘들다”고 했다. 김씨가 밖에 나오는 이유다. 탑골공원에 오는 이유다.
지난 7월 31일 종로구청과 종로경찰서는 탑골공원 담벼락 주변에서 장기판 이용을 금지하고, 노인들에게 장기판 및 의자 자진 철거를 유도했다. 장기판 철거 배경은 이렇다. 탑골공원은 조선시대 사찰 원각사터로 십층석탑(국보)이 남아 있고,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탑골공원 담벼락 주변으로 장기판을 구심점 삼아 인파가 몰리면서 노상 방뇨, 소음, 음주, 흡연, 쓰레기 투기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장기판이 많을 때는 20개까지 놓였는데, 장기판 하나에 많게는 10~12명씩 모였다는 게 탑골공원 관리사무소 직원의 설명이다. 주변 상인이나 공원 이용객들은 불편을 호소해왔다. 종로구로서는 장기판을 철거하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탑골공원 장기판 철거는 노인들의 여가생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장기를 두던 그 많은 노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종로구는 탑골공원에서 500m 거리인 서울노인복지센터 분관 장기·바둑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이곳은 자율이용제지만 서울시민에 한해 회원 등록을 해야 이용할 수 있다. 실내 공간을 답답해하거나, 경기·인천 등 다른 지역에서 온 노인들은 센터로 가지 않는다.
탑골공원 노인들이나 관리사무소 직원은 “종묘광장공원이나 보라매공원, 동묘공원 등 다른 공원으로 흩어졌다”고도 했다. 지난 10월 13일 종묘광장공원에서 만난 유모씨(62)는 “탑골공원은 장기를 주로 두고, 종묘공원은 바둑을 두기 때문에 탑골공원 분들이 여기로 오지는 않는다”고 했다. 탑골공원 노인들에게 복지서비스를 안내하는 탑골복지활동가(노인일자리) A씨는 “서울노인복지센터를 안내하니까 거기로 갔다. (안 간 사람들은) 낙원상가 다리 밑에서 장기를 두기도 하고 사실은 여기서 (장기판 철거가) 해제되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실제 탑골공원을 찾았을 때 주변에서 장기를 두는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장기판 철거 자체를 두고는 의견이 갈렸다. A씨는 “여기가 문화재인데 내기 장기를 하고 싸우고, 쓰레기 버리고…. 장기판 잘 치웠다고 칭찬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금천구에서 탑골공원에 온다는 B씨(79)는 “그냥 공원도 아니고, 장기판을 없앤 후 공원이 조용해져서 좋다”고 말했다. 장기를 두던 노인들로서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탑골공원 장기판을 제공하던 박손서씨는 지난 8월 인터뷰에서 “여기가 장기 천국이라고 했다. (장기판을 제공하는 일이) 보람 있는 일이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고 했다. 성북구에서 온 C씨(70대)는 본인이 탑골공원에서 장기를 두지는 않지만 “문제가 있으면 단속하는 인원을 늘리는 게 낫지, 여기는 없는 사람들이 와서 장기 두는 게 낙인데 그런 사람들은 어디로 가느냐”고 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탑골공원 장기판에 마음을 붙이고 출근하다시피 한 분들에게는 거기가 문화공간이자 하나의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기에 상실감이 컸을 것”이라고 했다.
장기를 두고 구경하는 노인들이 모두 문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숙인이나 취객 등이 일으키는 문제지 장기 두는 노인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종로구 관계자는 “(장기판 철거의) 핵심은 장기판이 있었을 때 노상 방뇨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2023년 탑골공원 노상 방뇨 문제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노인들의 의견 수렴 없이 장기판을 철거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종로구 관계자는 “노상 방뇨 문제가 커진 이후 간이화장실도 설치해보고, 관리사무소 직원도 지난해 2명에서 올해 3명으로 늘리고 1년간 계도 활동도 진행했다”고 말했다.
종로구는 지난 9월 17일 보도자료를 내고 원각사 십층석탑 유리보호각 정비, 서문 복원, 담장 정비 등을 포함한 ‘탑골공원 개선사업’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탑골공원을 전 세대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열린 시민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개선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탑골공원은 ‘노인들의 성지’라는 인식이 있는데 “공공 공간인 공원을 특정 세대가 점유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로구는 조만간 탑골공원을 구내 ‘1호 금주구역’으로도 지정할 계획이다. 다만 탑골공원이 노인들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라는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종로구도 탑골공원 노인들의 장기 놀이 문화를 지속할 실내 공간을 조만간 탑골공원 5분 거리에 조성할 계획이다. 현재 위치는 정해졌으나 예산이나 운영 방식(이용자 제한 사항, 공휴일 운영 여부 등)을 두고 서울시와 협의하면서 고민하고 있다고 종로구는 밝혔다.
노인들이 갈 만한 공간으로는 동네 공원이나 경로당, 노인복지관, 문화센터, 종교시설 등이 있다. 그럼에도 노인들은 탑골공원을 찾는다. 왜 그럴까. 지난 10월 13·14·16일 사흘간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공원 주변인들에게도 물었다.
① 무료급식 = 탑골복지활동가 A씨는 “강북구, 은평구 등 주로 멀리서 온다. 경기 동탄에서도 온다”며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밥을 공짜로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탑골공원 바로 옆에는 원각사 무료급식소를 비롯해 하루 서너 군데서 무료로 점심을 제공한다. 매일 오전 10시 30분쯤이면 공원 담벼락을 따라 긴 줄이 선다.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가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하늘궁 무료급식소는 많게는 하루 500명에게 도시락을 나눠주는데, 매일 오전 11시쯤이면 삼일문 앞에 구름 떼 같은 인파가 몰린다. 공원 주변에선 이발비, 음식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노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자판기의 커피값은 200~400원이다.
금천구 주민 B씨는 지하철 1호선 첫차를 타고 탑골공원에 온다. 그는 “여기 오면 밥도 먹고 간식도 받고 말동무도 있으니까 좋다”고 했다.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생계급여와 노인일자리 소득으로 생활한다. 일자리가 없는 날엔 오전엔 탑골공원에 와 점심을 먹고 오후엔 관악산에 오른다고 했다. B씨는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도 종종 점심을 먹는데 “배우고 싶은 것은 없어서” 동아리 활동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D씨(70대)는 부천에서 온다. D씨는 “오늘은 서울역에서도 무료급식이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매일, 365일 탑골공원에 와요. 뭐 할 거 있어요? 그냥 여기 주변을 하루종일 걷는 거지.”(D씨)
무료급식을 이용하는 인원이 워낙 많아 장기판을 없앤 후에도 탑골공원에 오는 노인 수가 크게 줄어든 건 아니다. 점심시간 전후 600~700명씩 오간다. 다만 머무르는 시간이 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골공원 인근에서 노점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예전엔 오후에도 노인들이 많았는데 장기판이 없어진 뒤로는 썰렁하다”고 했다. 실제 지난 10월 21일 오후 3시쯤 탑골공원 안팎에는 50~60명 정도만 있었다.
② 오락거리 = 장기는 탑골공원 노인들의 대표 오락거리였다. 노인들은 탑골공원 주변 광화문, 종묘, 세운상가, 종각 등을 걸으면 볼거리가 있다고 했다. 낙원상가와 극장이 있고 탑골공원 주변에서 노인 대상 행사가 자주 열린다. 오락거리·볼거리를 즐기려면 비용이 드는데, 탑골공원에서는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종묘광장공원에서 만난 유씨는 “바둑을 두는 기원이 동네마다 많이 있지만, 거기만 가도 몇천원씩 내야 한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기초연금이나 생계급여를 받는 분들이 많은데 돈 없으면 자기가 죽는 줄 안다. 이런 데는 공짜니까 좋아하는 것”이라고 했다.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의 여가활동으로 ‘휴식활동’(96.5%·1순위+2순위)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산책, 음악 감상, 가족·친지 방문, 목욕·사우나·낮잠 등이다. 노인의 26.5%가 경로당, 9.6%가 노인복지관, 3.5%가 사회복지관·장애인복지관·여성회관 등을 이용했다. 탑골공원은 이들 기관에 등록되는 걸 꺼리거나, 기관 활동에 흥미가 없거나, 기관에 다니면서도 추가로 시간을 보낼 공간이 필요한 이들이 찾는 것으로 보인다. 영등포구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일주일에 한 번씩 탑골공원에 온다는 E씨(87)는 “답답하니까 바람 쐬러” 탑골공원에 온다고 했다. 한 번 오면 2시간씩 쉬면서 사람 보고 경치 보며 쉬어간다고 했다. 부인과 자녀 가족과 함께 사는 그는 집 근처에는 공원은 없어서 탑골공원에 안 나오는 날에는 주로 집에서 TV를 보거나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③ 접근성 = 탑골공원은 지하철 1·3·5호선이 모두 정차하는 종로3가역 바로 옆이다. 지하철 요금이 무료인 노인들에게 접근성이 좋다. 2019년까지 서울에 살았다는 F씨(83)는 “서울이 그리워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인천지하철과 1호선을 타고 편도 2시간 걸려 탑골공원에 온다. 그는 “(놀 만한 곳으로) 월미도 같은 데 가려면 버스비가 드는데 그만큼도 아쉬우니까 잘 가지 않게 된다”고 했다. F씨는 대형 건설사 현장 반장으로 60세까지 일했다. 국민연금을 부었지만 일시불로 받아서 지인에게 준 후 돌려받지 못했다. 현재 사는 아파트 시세가 3억원대라서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은 아니며 기초연금으로 부부가 각각 월 27만원가량 받는다고 했다. 지난해까지는 노인일자리로 월 27만원 정도 벌었지만, 올해는 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노인에게 일자리가 가면서 근로소득이 없어졌다. “생활비가 좀 있을 때는 5000원짜리 짜장면도 먹고 그랬는데, 요즘은 약값 같은 거 쓰면 손주한테 과자를 사주고 싶어도 그 돈이 없어요. 내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까 자식들한테도 손 벌리지도 못하고….”
④ 동질감과 익명성 = B씨는 동네 경로당·노인복지관을 안 가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 마주치기 싫다”고 했다. 노인들은 경로당, 노인복지관에 가면 위화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했다. 옷도 차려입어야 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음을 드러내는 게 마음 편치 않은 것이다. 탑골공원에서는 비슷한 처지의 말벗을 사귀면서도 느슨한 관계를 맺는다. 탑골공원 관리사무소 직원의 말이다. “여기 오면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라고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아침에 처음 만났는데, 하루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서 대화하는 분들도 있어요.”
성북구에서 온 C씨는 “동네 공원도 한두 번이지, 괜히 ‘할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싫고 하니까 멀리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C씨는 “둘이 먹고살 정도”의 임대 소득을 받아 부부가 생활한다. 오전은 보통 집에서 보내고 점심을 먹고 밖에 나오는데, 탑골공원에 오지 않는 날은 동네 당구장이나 기원에 간다. 그는 노인복지관에도 다녀봤지만 지금은 가지 않는다. “복지관은 좋지요. 그런데 돈이 들어서 안 가요. 거기서 사람을 사귀면 밥을 같이 먹는데 그러다 보면 나도 한 번은 사야 하고, 차를 마시거나 노래방에 가거나 돈이 들어요. 당구장은 시간당 1000원씩 하는 데 가서 1시간, 많게는 4시간씩 시간 보낼 수 있고 하니까 거기로 가면 되죠. 나는 그래도 몇 시간인데, 아침부터 하루종일 나와 있어야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기니까 갈 데가 없을 거예요.”(C씨)
11년 전에 나온 ‘한국 노년층의 여가활동 유형화 및 영향요인 분석’ 보고서(황남희·보건사회연구·2014년)에서는 노인이 경험하는 네 가지 고통을 빈곤, 질병, 무위, 고독이라고 본다. 보고서는 “우리나라의 사회정책은 상대적으로 노년층의 질병과 빈곤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두고 있으며, 무위와 고독에 대해서는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분석한다. 탑골공원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네 가지 고통을 중첩적으로 겪는다. 탑골공원 장기판 철거 이슈는 초고령사회(노인인구가 전체인구의 20% 이상인 사회)로 진입한 한국사회에서 노인들의 여가문화를 어떻게 보장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장기판이 있든 없든 탑골공원에 오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이들이 겪는 네 가지 고통을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함을 보여준다.
최혜지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그분들이 장기를 두면서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면 낮에 거기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에게 필요한 공간이나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기회 등을 제공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없는지 등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기판을 치운 종로구를 비판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분들이 거리가 먼 곳임에도 불구하고 탑골공원에 왜 오는지 물어야 한다”고 했다. 최 교수는 “노인들도 공공장소에서의 질서나 규범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해치지 않는다면 (노인여가문화를 이야기할 때) ‘노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는 노인의 선택이자 자기 결정권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면서 “집 근처 공원을 가라, 경로당을 가라, 여기로 오라 이렇게 강요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종묘광장공원에서 바둑을 두는 유씨의 말이 인상적이다. “탑골공원이나 종묘나 외국인들이 많이 오니까 이렇게 바둑·장기 두는 것이 안 좋게 보일 수는 있어요. 그게 인식의 문제잖아요. 어제는 누군가 나눠먹으라고 여기에 삶은 밤을 놓고 갔어요. 나쁘게만은 안 보는 거죠. 제 생각에 노인들이 와서 자연스럽게 형성한 것은 민심이라서 막을 수가 없어요. 내가 물 마시고 싶어서 먹는 거지, 억지로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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